1. 인연법 - ※. 상황별로 알아보는 인연법 - 1). 용서할 수 없는 인연
※. 상황별로 알아보는 인연법
- 1). 용서할 수 없는 인연
①.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질 않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노와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트라우마처럼 나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고 싶지만, 트리거가 되면 자동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감정들과 그날의 기억들이 나를 더 힘들게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인연들은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또 왜 이런 인연들이 내게 왔을까요? 이런 것들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영영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테니까요.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관점으로 이 일을 풀어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스스로 해왔던 노력과 기존의 관점으로는 오늘날까지 결국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오늘은 조금은 뼈아프지만 있는 그대로의 대자연의 관점과 법칙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조금은 뼈아플 수 있지만, 용서란 무엇인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새로운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나는 기존 관점에서 자유로워지고 새로운 관점으로 더 올라갈 수 있습니다. 즉,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들의 과거를 한번 돌아볼까요? 조금은 뼈아프고, 불편하고, 듣기 싫은 이런 느낌이 들었던 시기들이 사실은 내가 가장 많이 변화하고 있는 순간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불편하더라도, 조금은 오픈된 가능성을 열어두고, 마음 편안하게 한번 본다면 지금 이 순간도 아주 유의미한 순간들이 될 것 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불편, 혼란, 의심, 두려움 등의 느낌은 내가 무의식에서부터 변화하고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들입니다. 무조건 나빠해야만 할 느낌들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럼 거두절미하고 바로 결론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인연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②. 대자연에는 '용서'란 개념이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용서한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나는 100% 잘 했고, 상대방은 100% 잘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애석하게도 대자연은 어떤 경우에도 이렇게 운행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3:7의 비율로 운행합니다. 만약 0:100이면 아예 나와 그 사람이 인연으로 만나질 않게 됩니다. 인간의 잣대로 볼 때는 저 사람이 내게 100% 잘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대자연의 관점에서는 내게 어려움이 생겼다면 내가 70% 아프던지, 30% 아프던지 둘 중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아픔을 겪었으면 내가 나의 잘못이 있어야만 아픔을 겪게 대자연이 운행한다는 것이죠. 내가 아팠다면, 나의 잘못을 찾아서 나의 공부를 하는 것만이 바른 길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용서해야만 내가 살 수 있을 만큼 상처를 입었다면, 인정하게 어렵겠지만 내 잘못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고 상대를 자꾸 잘못한 사람으로 만들고 남탓을 하면 내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제 100% 더 어려운 일이 분명 내게 오게 되는데, 이것이 바른 길이 아님을 대자연이 내게 일깨워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인정 안 해도 됩니다. 그리고 남탓을 하도 되나, 나는 결국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내가 아무리 그 사람을 용서했다고 공언해도, 대자연에서는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대자연은 너가 그 일로 공부가 더 깊이 됐는지, 안 됐는지만 봅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대자연의 법칙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세세히 파해쳐서 공부하고 이해를 해야 합니다.
내가 어려움을 겪었다면 내가 환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전에는 몰랐던 어떤 부분을 이해한다는 것은 앞으로 이 일이 내게 점점 안 일어나게 된다는 뜻과도 같습니다. 나쁜 일도 바르게 정리해서 이해를 하면, 내겐 공부가 되었기에 이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를 바르게 정리 못하면 또 나쁜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교통사고 난 사람이 자꾸 교통사고 나고, 병원에 한번 간 사람이 매번 가게 되고, 교도소 간 사람이 또 가게 됩니다. 욕들어 먹는 사람이 또 욕 먹고, 사기 당한 사람이 또 사기 당합니다. 도둑을 당한 사람이 또 도둑 당합니다. 대자연이 이 환경으로 나를 공부시키고자 하는데, 내가 깨우치지 않는 한 나는 여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용서와 복수의 개념은 인간사회에만 있으되, 인간이 쓸 수 있는 권리도, 자격도 없으며, 실제로 쓸 수도 없습니다. 나 혼자 내가 용서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는 것이지, 대자연에서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내가 바르게 공부해서 용서와 복수 등의 생각이 들 정도의 상처가 아예 내게 오지 않도록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누구한테 아픔을 겪었다고 그 사람을 용서하는 행위를 하면 정확하게 너는 더 어려워집니다. 내 아픔은 정확히 내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은 단순히 대자연의 환경에서 나를 일깨워주기 위한 그 역할을 한 것 뿐입니다. 물론 그 사람도 자신의 공부가 있겠지만, 그 공부를 하고 넘어가는지 아닌지는 또 그 사람의 몫입니다.
예를 들어, 나와 잘 알고 지내던 지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아주 좋은 투자처가 있다면서 내게 투자를 왜 해야만 하는지 설명을 했습니다. 나는 투자에 대해서 아예 잘 모르지만, 이 사람이 그렇다고 하니, 몇 년 동안 모은 몇 만불을 투자했습니다. 다음날부터 이 사람과 연락이 되질 않습니다. 3일이 지나서, 내가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 사람을 이제부터 죽도록 미워합니다. 그러나 대자연에서는 이 일이 일어나야만 했기 때문에 일어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역할을 상대가 한 것 뿐이죠. 진정 대자연의 관점으로 바르게 이 상황을 분별하려면, 이런 상황에서 누가 제일 아픈지를 먼저 진단해봐야 합니다. 사기를 친 사람이 제일 가슴이 아플까요? 사기를 당한 사람이 제일 가슴이 아플까요? 당연히 사기를 당한 사람의 가슴이 찢어집니다. 그럼 대자연의 관점에서는 누가 환자일까요? 사기를 당한 내가 환자입니다. 누가 더 아픈가를 봐야 합니다. 가장 많이 아픈 사람이 70% 잘못이 있고, 그보다는 적게 아픈 사람이 30%의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대자연은 나를 공부시키기 위해 이런 환경을 만든 것이니, 도대체 왜 이런 환경을 내가 겪어야만 하는지, 가슴이 아파도 내가 연구하고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 공부를 하지 않고, 내가 답답해 죽겠으니, 저 사람을 용서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 결국 나는 깨닫지 못했다면, 다음이 이것보다 더 큰 아픔을 분명히 겪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까지? 내가 깨달을 때까지 반복됩니다.
누가 내게 굉장히 안 좋은 짓을 해서 내가 그 사람을 아주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계속 미워하는 것이 내게 손해구나를 알게 되고, 이런 이야기들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이 사람을 미워하는 것을 그만하는 것이 낫겠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용서하겠다고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했다고 하면, 또 다른 누군가가 분명 나를 또 뒤통수 칩니다. 누군가를 용서했다고 하는 것은 나의 잘못을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를 용서할 수 있을 만큼 숭고한 것 마냥, 나는 이런 것을 당해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마냥, 합리화화는 것이고 나의 객기를 부리는 것입니다.
내가 상처를 겪었고, 아픔을 겪었으면, 내가 환자이구나를 깨닫고 내 잘못을 빨리 찾고 이를 공부해야지 누구를 용서하네 마네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너무 많이 당해서 이제는 그럴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나의 자식이라도 갑자기 돌변해서 너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공부를 하지 않는 한 계속 더 큰 아픔으로 반복됩니다. 내가 아무리 용서했다고 말해도, 용서가 된 것이 아닙니다. 나의 공부를 찾아서 하라는 신호입니다. 다시 정리해서, 인간이 인간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권리 자체가 처음부터 내게 없습니다. 왜 이 아픔을 내가 겪어야만 했는가를 찾고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공부가 되었다면 앞으로 이런 일은 두번 다시 안 겪습니다. 이것은 내가 이해했던 이해를 아예 못 했던, 대자연이 알아서 진행하는 것입니다.
③. 대자연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예
이제부터는 조금 더 나아가 일부러 극단적인 예들을 들어보려 합니다. 바로 죽음과 관련된 용서들입니다.
예를 들어, 내 자식을 저 사람이 죽였어도, 대자연의 관점에서는 그 사람이 나한테 잘못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인간이 지금 이해할 수 없지만, 대자연에는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자식이 이 때 이 환경에서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라면, 내 자식은 살인 당해서 갔지만, 주위 인연들에게 무엇을 남기기 위해 살인을 당하는 역할을 맡은 것입니다. 과연 무엇을 남기려 한 것일까요? 이런 것을 인간의 관점에서 못 찾는 것입니다.
우리는 윤회를 하면서 어떤 삶을 받아 오던지 항상 사명을 갖고 이 땅에 태어납니다. 이번 삶에서는 어떤 역할을 하고 가야하는 사명이 있고, 다음 윤회를 통해 다음 생에서는 또 어떤 역할을 할 사명을 받습니다. 한 명도 빠짐 없이 모두가 받아서 이 땅에 태어납니다.
다시 아까의 예시로 돌아가서, 우리 집안에서 내 자식이 안타깝게 살인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럼 내 자식은 죽었으니 영혼이 되어 또 다음 윤회를 위해 단계로 진행해서 가면 됩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남기고 간 충격과 여파가 있습니다. 이 자식은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이 충격과 메시지를 남기고 가기 위한 사명으로 이 땅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대자연 입장에서는 내 자식이 자기 삶에서 바른 역할과 사명을 잘 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문제는 남겨진 사람들입니다. 내 자식이 떠나면서 무엇인가를 남기고 갔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하느냐는 남겨진 사람들의 몫입니다. 자식이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우리 가족에게 남긴 이 메시지를 남겨진 사람들이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쓰면, 이 자식의 삶이 의미 있어 공덕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사람들이 이를 잘못 이해하고 잘못 쓰면, 자식이 희생했음에도 아무런 공덕을 못 얻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남겨진 사람들이 잘 못 쓰게 되면, 자식인 나는 집착으로 윤회의 과정을 밟으러 가지 못하고, 헤매게 됩니다. 내가 살면서 행했던 것이 하나도 의미있게 쓰이지 못하고 빛을 발하지 못하니, 나는 공덕을 받지 못해서 내가 갈 자리를 못 찾아가는 것입니다. 못 가게 되니, 남겨진 가족들에게 붙어서 자꾸 칭얼대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족들의 삶도 점점 어려워집니다. 자식인 나는 내가 받아온 역할을 충실히 했는데, 남겨진 사람들이 무식해서 내가 남긴 바른 메시지를 이해 못하고 또 예전처럼 살아가니, 내 공덕은 하나도 없게 된 것입니다.
내 가족 중에 사람이 죽었다면, 이는 남겨진 가족들에게 아주 최고의 강력한 메시지를 대자연이 준 것입니다. 집안 가족 사람들 대상으로 엄청난 사고가 일어나서 모두에게 한 번에 가장 큰 충격을 대자연이 준 것입니다. 그런데 남겨진 사람들은 '시간 지나면 다 잊혀진다' 이러면서 아무런 깨달음도 없고 발전도 없으니, 자신의 삶을 전부 희생하면서까지 메세지를 주고자 한 자식이 억울한 것입니다. 자식은 '나는 도대체 왜 죽은거지? 무슨 공덕이 있는건데?'라고 말하는거죠. 남겨진 사람들이 바르게 꺠치질 못하면, 아무 의미 없는 죽음이 된 것입니다.
그저 복잡하고 긴 과정을 글 한 페이지로 설명하려니, 잘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구에 태어나는 인생을 한번 받아오기 위해서 얼마나 길고 오랜 과정을 거쳐서, 간신히 기회를 받아서, 다시 윤회하여 이 지구에 온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소중한 기회의 내 인생에 주어진 사명이 나를 희생해서 남겨진 가족들에게 무엇인가를 일꺠워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깨워야 남겨진 가족들이 한단 높게 발전되고 삶의 방향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을 한단 일깨우지 못하면 집안 가족들 전부가 그 단계 안에 갇혀서 계속 머물게 됩니다. 내 자식이 태어나도 이 자식도 같은 단계에 머물고, 그 자식의 자식이 태어나도 또 같은 단계에 머물면서 가족줄 전체가 갇히는 것입니다.
이런 각자의 역할을 하는데, 각각의 가족 구성원들이 팀원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식인 나는 아무 공적이 없으니 윤회하는 단계를 밟지 못하고 떠돌면서 가족에 붙어서 칭얼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작 죽은 자식 자신도 이 원리를 모르고 하는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아쉽지만 가족도 전체가 1인치도 못 깨친 것입니다.
"부모인 내가 왜 이런 엄청난 어려움을 주는가?", "왜 이런 일이 내게 왔는가?", "왜 이런 일을 다른 사람이 아닌 구지 우리 가족이 겪어야만 하는가?" 이런 것들을 공부하고 배우려고 하고 찾으려 노력했어야 합니다. 대자연이 너희들이 한단 올라가라고, 공부하라고, 몇 세대를 지나도 너희 가족줄이 한 단을 못올라가고 있으니, 공부해서 한 단 올라가라고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 관점에서 벗어나 대자연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떄만이 이 고리가 풀리기 때문입니다. 내 자식을 죽인 저 사람에게 복수하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 왜 대자연은 우리에게 이런 충격와 어려움을 줄 수 밖에 없었는지를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힘들지만, 내 자식이 희생했어야만 하는 이유를 눈물을 머금고 공부해내야만 합니다. 이것이 남겨진 사람들의 책임이고 바른 길입니다.
마지막 다른 예를 들어볼께요. 우리는 국제 선교 봉사를 하는데, 그 어려운 후진국 사람들을 도우러 간다고 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는 좋은 나라에 살아서 뛰어나서 그 사람들을 도우러 간다고 생각한다면 분명 사고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돕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답부터 이야기하면 내가 공부하러 가는 것이지, 그 사람들을 도우러 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꾸 내가 돕는 활동을 하는 줄 알면서 참여하니 자꾸 선교활동 하다가 사고가 납니다. 누군가 납치되고, 다치고, 죽기까지 합니다. 대자연이 자꾸 이것이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라는 신호를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부를 하지 않아 이런 신호들을 모르니, 자기의 논리에 따라서 다 다르게 해석합니다. 어떤 선교사는 남은 사람들을 이해시켜야 하니, "간 사람은 하나님이 데려가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선교사는, "하나남이 계시면서 어떻게 저렇게 좋은 일을 하는데 죽게 했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또 크게 뉴스에 나와서 전 국민들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뉴스에 보도되어 전 국민들이 알도록 하는 큰 사건들은 전 국민들을 대상으로 무엇을 깨우치게 하기 위함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대자연이 메세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명의 국민으로써, 이 뉴스를 보고 대자연을 무엇을 우리에게 꺠우치게 하기 위해 이 사건이 뉴스를 통해 직접 내 눈을 통해 내 영혼까지 전달된다는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공부를 잘 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했는데 전 국민이 자기 사느라 바빠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면, 다음에는 더 큰 대대적인 사건이 터지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1명의 선교인이 납치되었지만, 다음에는 선교하러 가는 배 전체가 피납되는 더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이죠.
한번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은 그 다음에 이런 일이 더 크게 온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 진행형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깨달아서 유턴으로 방향을 털지 못하면, 또 일어나게 됩니다. 내가 해야 할 공부를 그만큼 따라가지 못하니 충격파를 주는 것입니다.
만약 개인이 어떤 사고를 당하고 조용히 오면 전 국민이 모릅니다. 하지만 가족은 알죠. 그럼 가족을 일깨우기 위해서 사고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큰 사고도 아닌데, 뉴스에 나서 전 국민이 알게 됩니다. 우연히 너한테 보이고 들리는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이 나의 공부 주제이기에 들리는 것입니다. 우연이란 절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등한시 하면 더 큰 일이 생기고, 또 등한시 하면 결고 무시할 수 없는 큰 사고가 터져서라도 결국 나를 알게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사회에 흉악범이 자꾸 생기고, 많이 생기고, 나중에는 우리 가족 중에 있을지 모를 만큼 많이 생깁니다. 왜? 신호를 계속 주는데 너희들이 등한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자연이 직접적인 공부와 연결된 그 가족들부터 아픔을 주면서 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부가 멀리 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바로 내 눈 앞에 있습니다. 내 귀에 들어오고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내 공부입니다. 멀리 있다고 생각하고 쫓아가지 마세요. 쫓아다닌다고 내 공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앞에 준 것을 잘 소화하면 됩니다. 내가 꺠닫기 위해 최고로 좋은 것들을 대자연이 이미 내 앞에 다 갖다줬습니다. 내 귀에 들리게 하고 내 눈에 보이게 합니다. 이를 다 무시하고 등한시 하고 놓치고 시간이 가면, 그 대가가 어려움이나 사고로 내게 충격이 오는 것입니다. 대자연은 이렇게 공부를 시키는 것입니다.
사고가 생겨서 충격파를 줍니다. 사고는 옳지 않은 사적인 생각들이 고도로 뭉쳤다는 것입니다. 나 개인이 사적인 분별로 잘못된 잣대를 자꾸 맞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 아주 많이 쌓여서 큰 충격파가 올 만큼 축적되었다는 것이죠. 큰 어려움이 생기거나 사고가 생기면, 그 원인을 나한테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사고와 어려움을 겪고 나서, 당사자가 상대방을 용서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 나 하나를 일꺠우려고 상대들이 움직여서 그 역할을 수행하고, 많은 시간들을 희생했는데, 내가 용서한다고 말하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대자연은 아직 정신을 못 차렸으니, 어쩔 수 없이 더 큰 충격을 준비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내가 만일 납치 당해서 힘든 일을 겪었습니다. 그럼 누가 아픕니까? 내가 아프죠. 납치 한 사람들은 자신의 프로젝트가 성공했다고 좋아합니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내가 많이 아플까요? 내 부모가 더 많이 아플까요? 나는 겪었으니 그저 겪는 것이지만, 아무것도 겪지 않은 부모들이 오히려 더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직접 경험한 나보다 더 아프고 힘들어 하면, 그럼 부모의 잘못과 공부가 직접 당한 나보다 더 큰 것을 대자연이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 혼자 겪었다면, 나 혼자의 공부로 온 것입니다.
어떤 사고가 생겼을 때, 이 상황으로 지금 누가 가장 아프냐를 분별하면 누가 가장 공부를 많이 해야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픈 사람이 환자입니다. 환자가 깨우치고 공부해서 노력해야지 환자가 노력은 안하고 남을 용서한다고 하면 안 됩니다.
어려움을 겪고 배움을 찾아 종교인이든 멘토이든 누구를 찾아서 어려움을 하소연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 뭐 다 지나간 일인데 큰 신경쓰지 말고 걱정말라"라고 한다면, '아~ 내가 실력이 없는 사람을 만났구나'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은 "오~ 그런 일이 있었어?"라고 하니, '아~ 나랑 똑같은 놈을 만났구나'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를 탁 짚어서 진단을 해서 왜 그런지 원리도 알려주고, 누가 환자인지 그래서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하면 좋아지는지 처방까지 모두 다 정확히 준다면 이는 실력자입니다. 내가 보지 못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고, 길을 열어주고, 임시적은 방법이 아닌 근워적인 방법을 알려주니 이가 진정한 멘토입니다.
내가 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는지를 이해하면서, '내가 이럴 수 있게끔 그동안 산 것이 있구나', '우리 집안에 이런 이런 기운이 돌았구나' 등 자신을 돌아보면, 이를 지켜보고 있던 대자연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오~ 이제 이해 되느냐?'
하면서 어려움이 멈추고, 내가 공부를 바르게 하는 만큼 좋은 일을 주기 시작합니다. 내가 나의 잘못인지 알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느냐면 딱 하나로 귀결됩니다. 모든 것에 남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남을 탓하지 않습니다. 남을 원망할 것이 원래부터 없었다는 이치를 알게 되기 떄문입니다. 그러니 용서라는 개념도 없는 것입니다.
상대는 자신이 알던 모르던 어떤 역할을 수행한 것이지, 대자연 관점에서 그 상대게 내게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잘못은 내게 있고, 우리 가족 집안 줄의 잘못을 나한테까지 물려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업입니다. 가족 조상들이 잘못 살아서 사적인 기운이 뭉쳐서 내려온 것도 내가 풀지 못하면 내 자식대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런 가족의 업을 내 대에서 잘 풀어내면 이미 돌아기신 부모님들도, 우리 조상님들도 나 하나가 깨우침으로써 모두 함께 해탈하게 됩니다. 그럴려고 그들은 죽어서도 수호신으로 내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일꺠워서 하나가 풀려서 한단계 올라가면 나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대대로 이 공부를 못 풀었던 조상들도 한꺼번에 다 함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업이 풀리는 순간입니다.
모든 인류가 발전하는 길은 하나입니다. 처음에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들을 배웁니다. 개개인마다 무엇을 먼저 배우고 무엇을 나중에 배우는지는 다를 수 있습니다. 지식인들도 학교에서 공부할 때 수학을 먼저 배우고 다른 것은 나중에 배우고 등의 순서가 있듯이 말이죠. 이렇게 결국 모든 분야의 일반 지식이 다 차면, 지식인들이 손대기 시작하는 분야가 철학입니다. 또는 영적인 분야입니다. 모든 지식인들은 결국에는 다 철학, 영성공부로 귀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철학의 질량이 높으니 맨 마지막에 배우는 것입니다. 철학, 신 등의 이런 분야는 제일 나중에 하는 공부이기 때문에 맨 마지막에 배우기 때문에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이지, 모두가 이 이 하나의 귀결점으로 오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지식인들이 다 이쪽 분야로 몰리고 있고 앞으로 훨씬 더 많이 몰릴 것입니다. 이는 대자연의 방향이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
지식인들이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은 어느정도 다 공부했지만, 그 다음 높은 단계인 비물질 영역의 공부를 할 수 밖에 없게 만듭니다. 그래야만 풀리지 않는 나의 인생, 가족의 문제, 이웃의 문제, 나라의 문제, 의학의 문제, 과학의 문제 등 모든 것들이 비로소 풀리기 때문입니다.
지식인들이 일반지식을 다 갖췄기에 기본 내공은 다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이런 진리 지식을 공부해서 영혼의 밀도를 높여야 합니다. 이 밀도까지 아주 높아져서 남을 위해 남은 내 인생을 불태우면서 살 수 있을 만큼 커질 때, 이 사람을 홍익인간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목적인 무엇인지, 나는 어떤 사명을 이루고 가야하는지, 내 삶의 어려움은 왜 오는지,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할 홍익시대가 왔습니다.
우리는 홍익시대를 살아야할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과도기를 겪고 있지만,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 사는 것이 상식이 되는 시대를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떄를 위해서라도 나를 갖추고 대자연을 공부해야 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내가 어려운 일을 당했다면 이는 내 공부거리입니다. 이를 남탓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내 안에서 내 공부를 찾아서 삶의 방향을 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왜 이 어려움이 왔는지 깊이 있게 이해해야지만 이것이 풀리고, 나는 전체적으로 다 이해가 됐기 때문에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니, 마침내 이 공부가 끝난 것입니다. 완전히 이해하고 나니 그 사람들 욕을 안 합니다. 그 사람들 탓을 안 합니다. 이렇게 남탓하지 않고, 불만을 안 할 때, 내 인생이 풀리게 됩니다. 상대를 탓하는데 내 인생이 잘 된다? 이런 법칙은 절대 대자연에 없습니다. 누구든 어려움이 있으면 왜 나는 이런 일을 겪어야만 하는지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해서 이해가 되면, 삶은 알아서 좋아집니다.
요약
용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대자연에는 용서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어려움은 나의 잘못에서 비롯되며, 이를 인정하고 공부해야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픔을 겪었다면 이는 대자연이 나를 깨우치기 위해 주어진 환경이며, 상대는 단순히 그 역할을 수행한 것일 뿐입니다. 용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를 깊이 연구하고 이해해야 반복되는 고리를 끊을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은 당사자는 자신의 잘못과 가족의 업을 풀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남을 원망하거나 용서했다고 자처하면 더 큰 아픔이 반복됩니다. 대자연의 법칙을 깨닫고 공부하면 개인뿐 아니라 가족과 조상까지 함께 발전할 수 있으며, 이는 홍익시대의 근본 원칙이기도 합니다.